(1978년 5월10일 서라벌레코드 발매) [김창완(g, v), 김창훈(b, v), 김창익(d)]
01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02 노래 불러요
03 안개속에 핀 꽃
04 둘이서
05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
06 어느날 피었네
07 나 어떡해
08 이 기쁨
09 정말 그런 것 같애
10 떠나는 우리님
1집이 나온 지 5개월 뒤인 1978년 5월에 후닥닥 나온 산울림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이다. 녹음도 3월부터 4월에 걸쳐 이촌동의 서울스튜디오에서 후닥닥 해치웠다. 그러니까 아직 “아니 벌써”와 “아마 늦은 여름일 거야”가 던져준 충격파가 가라앉지 않은 시점에서 연발타를 때린 작품이다. 이 경우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했다’같은 평은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야구에 비교하자면 연속 타자 홈런(3집을 고려한다면 3연속 타자 홈런)을 두들겨 맞은 충격과 비슷하니까.
충격의 진상을 알아 보기 전에 누가 충격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한 리뷰에 나와 있는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 메탈의 영향이 보인다”는 평이
그 힌트일 것이다.
이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단지 산울림의 음반이 ‘매니아적 취향에 부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달리 말해 외국(영미)의 팝송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국산 음악이었다.
즉, 산울림의 음악은 일반 대중도 좋아했지만, 음악 깨나 듣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어떤 면이 ‘프로그레시브 록’이고, 또 어떤 면이 ‘헤비 메탈’인가.
세세하게 따진다면 그 영향을 검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산울림의 음악을 경험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산울림의 음악에는 장르를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산울림의 음악을 ‘펑크’라고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헤비 메탈의 이름을 갖다 대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기성의 단어를 고른다면 이 음반의 독특함은 ‘싸이키델릭’하면서 ‘아마추어적’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당시 한국에서 ‘싸이키델릭’은 ‘아마추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1960년대 거라지 록’ 같은 것은 알려지지 않았고 산울림 멤버들이 이런 음악을 들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그런데 이 음반을 들어 보면 아마추어가 연주하는 싸이키델리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단, 미국의 차고가 아닌 한국의 ‘가정집’의 방이다. (참고로 ‘가정집’이란 전통 한옥과 아파트 사이의 시기를 지배했던 한국형 가옥구조를 말한다). 첫 곡을 들어 보자.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 뒷면 첫곡인 “어느 날 피었네”와 더불어- 전주가 3분 씩이나 지속되는 곡이다. 즉, 곡 전체 길이의 절반을 채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방송에 내보낼 때 전주를 부분적으로 잘라 낸 다음에야 내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주는 김창훈의 베이스 리프가 주도하는데 그의 연주는 프로페셔널 연주자가 쌈빡한 테크닉으로 청자를 압도하는 것과는 다르다. 연주가 금세 틀려서 ‘삑사리’가 날 것 같은 불안한 진행이 오히려 청자를 긴장시키고 몰입시킨다. 드럼이 가세해서 전주가 이어지는 동안 멀리서 작은 볼륨으로 들려오는 기타 사운드는 또다른 공간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환각을 낳는다.
노래가 나오는 것은 퍼즈 기타가 한번 휘몰아친 다음이다. 예의 그 얼빠진 듯한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가 등장하고 “아,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라는 후렴구의 가사는 역사적인 명가사로 뽑힐 만큼 시적이고 시각적이고 나아가 시청각적이다. 이어지는 “노래 불러요”는 빠른 템포의 직선적인 록 넘버이고 ‘개구쟁이처럼 놀자’는 산울림주의의 한 요소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안개 속에 핀 꽃”은 이 음반의 숨겨진 명곡이라고 할 만한 곡으로 복잡한 구성과 템포와 리듬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거장적 연주만 있으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부를 만한 곡이다(물론 거장적 연주가 없다는 것은 다행스럽다). ‘매니아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곡이다. 그리고는 분위기가 싹 바뀐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키보드 소리와 베이스의 진행 위에서 뒤에 고독하고 절망적인 측면을 보여주면서 1980년대에 발표될 김창완의 명곡(발라드?)들을 예시해 주고, 쓰리 핑거 주법으로 일관하는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는 김창완의 음악적 뿌리가 통기타 포크도 아우른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산울림식 서정을 처음 선보인다. 뒷면은 앞면 만큼의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 피었네”를 여는 묵직한 기타 리프와 베이스 라인은 다시 한번의 파격을 기대하게 하지만, 그 뒤로는 ‘파격도 한두 번이지 여러 번 반복되면 만성’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특히 “어느 날 피었네”나 “이 기쁨”에 등장하는 이박사 톤의 오르간 리프가 시대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게 들리는 것은 톤 그 자체가 낡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남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애”같은 곡은 ‘산울림의 곡이라고 모두 신선하고 파격적인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 같고, “나 어떡해”에 대해서도 특별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이다. 단, “어이야 데야”라는 타령조의 처연한 후렴구가 들어 있는 “떠나는 우리 님”은 앨범의 마무리로 적절하다. 1집의 마무리도 “아리랑”의 멜로디가 들어간 “청자”가 담당하고 있지만 “떠나는 우리 님”이 “청자”에 비해 ‘우리 것과의 결합’이 보다 유기적이다. 전반적으로 1집에 비해서 퍼즈 기타의 솔로가 비중이 작아지고 그 대신 오르간과 베이스의 비중이 커졌다(베이스는 몇몇 곡에서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운드의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울림이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더욱 가치있다. 몇몇 곡의 경우 ‘아쉽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의 아쉬움 없이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아티스트는 전세계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을 관통하는 산울림 특유의 정서가 확립되어 있다. 그 정서의 실체를 말할 수 있을까. 혹시 ‘건전의 탈을 쓴 퇴폐’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만큼 산울림은 괴물같은 존재다. 김창완 본인은 산울림을 ‘공룡’이라고 표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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