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명상음악] 목향

zkvnclsh20 2017. 2. 14. 01:04




      관용의선비  송순 ” - 담양 면앙정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자 이복동생 명종이 임금이 된다.
      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 임금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라고.
      그리하여 인종의 상중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대윤 윤임 일파는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한다.
      이 때 송순(1493-1582)은 상춘가 傷春歌 를 짓는다.
      상춘가 傷春歌는 봄을 슬퍼하는 노래이다.
      을사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림들을
      봄 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 비유하여 세상을 개탄한 노래이다

      마치 암울했던 1970년대 80년대에 세상을 풍자하다가
      금지된 대중가요처럼.여기에서 꽃은 사화로 희생된 현인 사림들이고
      바람은 간신배들을 말하며,희짓는(심술부리는) 봄’은
      어수선한 세태를 말한다.

      송순은 담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1519년 10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시험관이었던 조광조는
      그의 문장이 김일손 이후 최고라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송순은 크게 낙담하며
      사림들의 꿈이 가라앉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아래 시를 쓴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별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1533년에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담양으로 낙향한다
      김안로의 전횡을 간언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면앙정을 짓고서 시 읊고 자연을 벗 삼아 4년간을 지낸다.

      어쩌면  송순은 타고난 벼슬 운이 있었나 보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약을 받은 지 5일 만에
      그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된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1542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한다.

      다시 1545년 을사사화 시절로 돌아가자
      송순은 상춘가 때문에 화를 입을 뻔하였다
      어느 기생이 잔치 집에서 상춘가를 노래로 불렀다.
      이 잔치에는 윤원형 일파의 한 사람인 진복창도 참석하였다
      이 노래를 들은 진복창은 불온 노래라고 말하면서
      기생에게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추궁하였다.
      다행히도 그 기생이 끝내 묵묵부답하여 송순은 화를 면하였다.

      명종3년(1547년), 정미사화가 일어난 해 55세의 송순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시를 짓는다.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이 桃李야 꽃인 채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어느 날 하루 명종 임금이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꺾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노래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당의 관리들은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해 하였다.

      이 날 숙직인 송순이 이 말을 듣고  옥당관에게 시를 지어 올렸다.
      명종 임금은 이 시를 보고 감탄하여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송순은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시는 바람과 서리가 섞어 치는 시대 상황에서
      황국화와 복숭아나 자두 꽃을 은유적으로 대조하면서
      풍상에도 늦가을 까지 피는 황국화야 말로
      충절과 지조를 지키는  선비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시를 여러 편 쓴 송순은
      1550년에 대사헌 ·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윤원형 일파인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그해 6월에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수원 등으로 귀양을 갔다.
      1년 반 후에 귀양에서 풀려난다.
      1552년 3월에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다시 짓는다.
      이  정자를 지은 후에 그는 자연가를 읊는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을 만나러 면앙정을 간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에 있다.
      주자창 입구에서 수십 계단을 두 번 올라가면 탁 트인 곳이 나오고
      그  한 쪽에 정자가 있다.
      정자 뒤는 벼랑이고 정자에서
      바라보면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깔린 평야,
      그리고 파란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면앙정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운데 있는 면앙정 현판이다.
      이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성수침(1493-1564)이 썼다 한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 하였다.
      송순은 이 글씨를 받기위하여
      친히 송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정자의 마루 왼편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퇴계 이황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가 함께 적힌 현판
      석천 임억령과 제봉 고경명의 <면앙정 30영> 편액
      그리고 동악 이안눌의 <차벽상운> 현판 등이 붙어 있다.

      다른 쪽 정자 마루에는 정조 임금이 호남향시에 출제한
      <하여 면앙정 荷與?仰亭> 어제 御題와 송순과 소세양의 시,
      소쇄처사의 시, 그리고  기대승의 <면앙정기>등이 붙어 있다.

      먼저 송순이 지은 <면앙정 삼언가>를 살펴보자.

      俛有地 仰有天  면유지 앙유천
      亭其中 興浩然  정기중 흥호연
      招風月 揖山川  초풍월 섭산천
      扶藜杖 送百年  부여장 송백년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이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노는 무위도가인가.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이 첫 구절에 송순의 마음이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면앙정이라 한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원래 면앙 俛仰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
      (앙불괴어천 仰不怪於天,부부작어인 俯不作於人)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 <맹자> 진심장 盡心章에서 말한 부앙 俯仰을
      조금 바꾼 것이다.
      맹자의 <진심장 盡心章>에는 군자삼락 君子三樂이 실려 있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송순이 살았던 당시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로서
      지조 있는 선비들은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면앙이란 뜻은 송순 자신의 수신 修身이요 삶의 길이었다.
      이런 인생관이 위 시
      <면앙정 3언가 俛仰亭三言歌>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하겠다.


      정자의 오른편 마루에는 정조 임금의 어제 御題가 붙어 있다.
      정조 임금은 1798년에 향시인 도과 道科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광주목사는 서형수이다. 시제는 ‘하여면앙정 荷輿?仰亭’이었다.
      송순은 87세 (1579년)때 이곳 면앙정에서
      그의 과거 급제 60돌  축하 잔치인 회방연을  열었다.
      이 날 면앙정 위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오른 그 때와 같았으며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기운이 절반이나 취할 무렵 당시 수찬 정철이 가로되
      우리 모두가 이 어른을 위해 죽여 竹輿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등이 죽여를 붙들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으로 여겼다.
      이는 실로 옛날에도 없었던 훌륭한 행사였다.

      이 송순의 회방연 일화를 정조 임금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시험문제로 내었으니
      송순은 정말 호남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면앙 송순. 그는 관용 寬容과 대도 大道의 학자였다.
      그는 부인 설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해관 海寬과 해용 海容이었다.
      앞의 ‘해 海’ 항렬자 뒤에 붙인 이름자가 ‘관’과 ‘용’이다.
      두 아들의 뒤 글자를 합치면 관용이 된다.
      이는 그만큼 그가 관용을 신조로 하는 포용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가 대도의 학자로 평가 받는 것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희생당한 사림들에 대한 비통함을
      시로 표현하면서 큰 길을 가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이란 그의 호가 말 해 주듯이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삶,
      대도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면앙정에서 앞을  바라보면 상수리나무가  한그루 있다.
      200년 되었다는 나무인데 이 나무가 정자를 버티고 있다.
      당산나무처럼. 면앙 송순
      그는 상수리나무 같은 호남의 큰 선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