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거처의 가을 저녁' 山居秋暝(산거추명)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공산신우후 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명월송간조 청천석상류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죽훤귀완녀 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수의춘방헐 왕손자가류
* 산 속 거처의 가을 저녁
빈 산에 비 갓 내린 후
날씨는 어느새 가을되어
밝은 달 솔 사이로 비추고
맑은 샘 돌 위로 흐르네
대숲이 부스럭, 빨래하고 가는 여인
흔들리는 연꽃 아래 고깃배 지나가네
봄날의 꽃향기 없은들 어떠하리
나도 스스로 여기에 머무르리라...
* 喧 : 떠들썩할 훤, 浣 : 빨래할 완, 隨意 : 그럴지언정
春芳 : 봄꽃 향기, 王孫 : 귀족 자제들에 대한 범칭
왕 유(王 維)는 50세가 되었을 때 벼슬을 사직하고 장안(당나라 수
도, 지금의 서안) 교외의 망천(輞川)별장에 은거하며, 주위 20 여곳의
경물(景物)들을 그린 시들을 지었습니다.
망천집(輞川集)이라 이름한 책에 들어 있는 이 시들을, 후대 송(宋)
의 소 동파(蘇東坡) 시인은 시속에 그림이 있다 하여 '詩中有畵'라고
평하였습니다.
갓 내린 비가 씻은 맑은 가을 어스름 저녁.. 달은 이미 밝게 떠 있고
맑은 샘물은 돌 위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고요한 정경
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숲이 버석거리는 걸 보니.. 아하 앞 냇가에서 빨래
를 마치고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는가 봅니다. 이어서 무성한 연잎들이
출렁 움직이는 걸 보니 흠.. 그 밑으로는 작은 고깃배가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겠고....
화면에는.. 가을 어스름의 '고요한 경물'이 먼저 그려지고 나서, '움
직이는 경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빨래하던 여인이 지나며 건드리는 대나무가 움직이고, 조용하던 연
잎이 출렁입니다. 무엇이 지나가듯이 대숲의 버석거리는 소리와 무성
한 연잎 아래 고깃배의 삐이걱 노젓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마치
비디오를 보는 듯 정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봄날같은 꽃향기는 없더라도.. 나는 이곳에서 머무르리라.. 그의 어
머니가 위중하여서 망천으로 돌아온 왕 유이지만, 자연을 벗하는 그의
마음이 십분 느껴지는 시입니다.
수만자의 한자(漢字) 중에서 적합한 한 자(字) 한 자(字)를 골라서
바둑판에 돌을 놓듯 그려가는 한시(漢詩)의 독특한 형식...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음은, 성당(盛唐)의 대
표적인 시인이었던 왕 유가 또한 실제로 중국 문인화(文人畵)의 초석
을 놓은 화가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알면 잘 이해가 갑니다.
저녁노을: 대금 아쟁합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