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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의 아침

zkvnclsh20 2013. 6. 28. 07:25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中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妙香山) 상악(上嶽), 지리산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중(三嶽中)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鷄龍山)의 서편 기슭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천불전(天佛殿)과 보광명전(普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사승(寺僧)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寺僧 사정 신징 경환 일행 정화 균행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범우고 등에 따르면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으며 청주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한 1000명의 승군으로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찿았다. 한편 금산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 군대가 왜군에게 패전하여 왜적이 다시 창궐하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곧바로 금산의 외곽에 진영을 갖추고 있을 때 왜병이 쳐들어와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와 의병들이 전의를 잃고는 의병장 조헌이 이미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물러섬만 같지 못하다고 퇴각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오히려 영규대사는 그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게 되면 죽는 것이거늘 어찌 홀로 살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는 흐트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토록 싸웠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이로써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병과 싸움으로써 왜군의 호남침공을 끝내 저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충의를 포상하여 복국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를 추증하고 당시의 뜻을 기리도록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공주시 겨룡면 유평리에 묘가 있다.)

그리고 갑사는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수행도량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고자 사천왕문 복원불사를 하였고, 법당 바로 앞에 위치한 강당을 충청남도와 공주시의 협조로 현 위치로 이전 불사함과 동시에 사물각(범종루)을 불사하였다. 백제 위덕왕 때 혜명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소실된 천불전을 최근 다시 건립하여 관음천불을 모셨으며,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음미하며 심신안정을 취할 수 있는 다반향초를 건립중이다. 국보인 삼신불괘불탱 보호전각 건립이 착공단계에 있는 등 크고 작은 많은 보수, 신축을 함으로써 갑사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영규대사 추모관 건립 또한 추진 중에 있다. 갑사는 岬寺, 岬士寺, 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어 지다가 으뜸 또는 첫째란 뜻의 지금의 명칭은 18세기말 산 이름을 따서 鷄龍甲寺로 불리어지고 있고, 1911년 제정된 사찰령에 따라 마곡사의 首말사가 되었고 경내에는 15동의 불전과 승당, 부속 전각들이 있으며 주변 산골짝 여러 곳에 산내 암자를 두고 있다. (갑사홈..)

 

 전날 부여 궁남지 ,정림사지.부소산성구경마치고 공주로 나오는길에 소나기같은 비가 시작햇다.

내심 고민하다가 저번에 포기햇던 계룡산 종주를 비 맞고라도 하자는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결심으로

숙박결정 아~얼마다 역사의 길이 남을  결정인가는 다음날 바로 확인 할수 있엇다 ㅎ

새벽3시에 일어나서 전날 피로에 쌓인 다리 근육좀 풀어주고 7시가 첫차라는 말에 4키로정도야 걸어서 가자

겁없이 아니 기다리기 싫어서 고고 ㅋ

 

 10분걸엇더니 계룡산 면사무소 도착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우리전통양식 건물 포착

헉~!!

임진왜란때 왜놈들과 싸우신 의병 대장

그것도 승려의병장이라신다.친일파가 득세하는 작금의 현실  그저 나무아미타불 입니다ㅡ.ㅡ

 다시한번 고개숙여 나무아미타불()()()

 숙연해진마음으로 다시 걸음채촉하는데 어디서 새소리 비슷한게 들리려서 자세히밧더니

정다운제비집이 보이고 어미인지 아빠인지 먹이을 물어다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라 부산하더군요

사진한장 찍을요량으로 다가갓더니 글쎄 먹이잡으로 나가던 엄마제비가

↓딱 저렇게 어림없다는 자세로 버티더군요 ㅎ

 

 

 

 갑사 들어가는 길목에 마주친 여러 장승 아자씨들 언제까지 서있나 내기할려다가 배고파서 다음으로 미루고 ㅎ

 배고플때만 무지 좋아하는 식당들 앞으로 ...ㅎ

너무 이른아침이라 식당 문연집이 한곳도 없엇음 흐흑

할수없다 산에서 초근목피로 배채우자는 쓸떼없는 생각만 ㅡ.ㅡ

 어느절이든 일주문은 너무 당당하고 머싯다는 ...

 대충 흩어보고 ㅋ

 이거보는척 하면서 매표소 아자씨 모르게 담배한개비 피엇음 ㅎㅎ

 오~호  이 신선한 공기 비온뒤에 상쾌함 배고픔을 잊게하는 마법 ㅎ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 넋이 빠지는거 잡고 다니느라 고생햇답니다 ㅎ

 다리에서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흐르는소리 햇빛에 반짝이는 영롱한 이슬방울 피어오르는 안개속삭임 이곳이 무릉도원이자 지상의낙원이구나

 기억에 물흐는방향으론  사진 첨찍어본것같음 ㅎ

 

 

 다리 난간사이로 보이는 풍경도 한컷 ㅋ

 

 

 다시 길을 재촉하며

 

 갑사의 보물이라는 부도군

 오늘길에 다 버려서  해우소는 통과 ㅎ

 

 2박3일 템플스테이가 한참이더군요  참나를 찾아서 한번쯤 해보면 좋겟다는

 멀리 오늘 목적지 계룡산이 빨리오라고 부르는것 같다

 문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문 못열여보고 그냥 지나친곳 ㅎ

 

 

 1미터정도 깊이의 땅속 화분 ??

아마 땅을 복토해서 저런모습이 됫나 ??

 이른아침이라 사찰 구경하기가 난감  대충 멀리서 한컷 ㅎ

 

 

 

감로수 한잔 으로 갑사 구경은 마무리 ㅎ 금잔디고개를 향해서 털레털레 길 떠나 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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